경제논평

외환위기는 다른 나라로부터 돈을 꾸었다 갚지 못하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돈을 꾸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건실하게 성장하는 기업이 자기자본으로 모자라는 투자재원을 부채로 조달하듯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역시 돈을 빌려 국내저축보다 큰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다. 물론 빌린 돈으로 얻는 수익이 부채에 대한 이자보다 크다는 전제조건이 붙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의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빌려면 문제가 생기기 쉽다. 나중 언젠가 더 벌어서 갚지 못하면 부도가 나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돈을 더 벌리면 경쟁력이 높아져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전체로 빚을 진다는 것은 그 구성 요소인 가계, 기업, 정부가 외국에서 외환을 빌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국가부채라는 표현은 사실상 정부부채를 의미한다. 아직은 일본이나 우리나라처럼 정부부채의 주 재원이 국내저축인 나라가 많지만 경제통합이 가속화되면서 그리스처럼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스의 최근 위기는 재정위기와 외환위기가 겹친 상황이다. 정부가 빚을 많이 졌는데, 그 상당부분이 외국자본에게 진 것이다. 상당수 남미 국가들 역시 방만한 재정운영을 하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외환위기를 겪었다. 이들은 구조적 재정적자를 통화증발을 통해 해소하려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는데, 표면적인 금융위기가 심각하다 보니 밑에 깔린 재정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로존(Euro zone)에 묶여있는 그리스는 자의적으로 돈을 찍어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대신 유로화라는 공통의 통화를 쓰는 덕택에 다른 나라로부터 돈을 빌리기는 비교적 수월했다. 만일 그리스가 자국통화를 사용하는 경우였다면 취약한 경쟁력이 부각되면서 프리미엄이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경쟁력이나 생활수준을 좌우하는 기본 변수는 생산성이다. 같은 제품이라도 값이 싸면 잘 팔릴 것이다. 국제 시장에서 제품 값을 경쟁력 있게 유지하려면 근본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거나 임금 같은 생산비용을 낮추어야 한다. 정부가 기업에 수출 보조금을 줌으로써 제품가격을 낮출 수도 있지만 요즘은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방식이다. 경쟁력은 수출과 수입의 차이인 무역수지에 반영되는데 경쟁력이 높은 국가가 흑자국이 될 것이다. 만일 환율의 자유로운 변동이 허용된다면 무역적자국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를 통해 경쟁력을 회복하게 된다. 때로는 정부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기도 한다. 대미 무역흑자국인 중국이 자국 통화가치를 달러화에 연동시켜 놓는 것이나 우리 정부가 경상수지 흑자에 따른 환율절상 속도를 낮추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경쟁력이 떨어져 무역적자를 보게 되면 자연 외국에서 돈을 빌려야 한다. 수출로 벌어들인 외환으로는 수입 재원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적자기조는 경쟁력을 회복하기 전에는 바뀌기 어렵다. 자연 대외부채가 늘어나고 이를 갚지 못하는 경우 대외채무 불이행으로 이어진다.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환율을 조정하는 것이 우선순위지만 채무국들은 환율변동에 따른 외국자본의 이탈을 우려해 환율을 오히려 고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단기자본들은 환위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는 자본의 연쇄이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 즉 내부 혁신이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 이런 식으로 무역적자를 줄이지 못하면 통화의 평가절하 압력을 오래 견디기 힘들게 된다. 그런데 정부 자신부터 규율이 흐트러진 나라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할 리 없다. 수출 부진으로 인한 총수요 감소를 당장 정부가 빚을 지거나 통화를 풀어 해결하려다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결국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고 외국자본들이 본격적으로 이탈하면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스 위기 역시 이런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유로존에 속하기 때문에 자체 환율조정을 통한 경쟁력 확보가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유로화 자체가 평가절하되면 어느 정도 그리스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의 주 교역국은 독일 등 유로존 내의 국가들이다. 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안 되면 임금하락 등을 통해 소득수준이 줄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고통 대신 그리스 정부는 계속 주변 나라들로부터 돈을 빌려와 총수요를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재정은 적자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게 됐다. 여기에 국제 금융위기를 겪으며 정부재정은 더욱 엉망이 됐다. 급기야 경계심을 느낀 외국 채권자들이 채무를 연장해주지 않으려 하면서 그리스 외환위기는 시작된 것이다.

일단 주변 유럽국가와 국제통화기금(IMF)의 위기 대비 기금 조성으로 한 고비는 넘겼지만 그리스의 국가 신뢰가 되살아나려면 경쟁력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내 보내 환율조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한 방식이다. 보다 근본적인 처방은 구조조정을 통해 그리스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도 아니라면 임금 수준을 대폭 낮추어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밖에 없다. 하나같이 어려운 선택이다. 이러한 방식들을 고려하기에 앞서 일단 재정적자를 통해 총수요를 유지하는 습성부터 고쳐야 한다. 돈을 빌려 소비하는 정신자세로 구조조정의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채권자들도 뭔가 진전이 있지 않으면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실제 독일 등 채권국과 IMF가 7500억 유로에 달하는 기금 조성의 전제조건으로 강력한 재정긴축을 요구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총수요 긴축 정책을 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재정긴축에 항의해 거리 폭동이 일어나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여름 내내 독일 개미에게 돈 빌려 생활하며 ‘랄라라~’ 노래 부르던 그리스 베짱이의 겨울은 추울 수밖에 없다. 아마 지금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라고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만일 그리스가 경제 문제를 이해하는 유능한 지도자를 가졌고 확실한 재정규율을 갖추었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빚을 지는 대신 허리띠를 졸라매고 구조적 비효율을 없애며 새로운 경쟁력을 찾는 일이 정부의 일차 목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자리 늘린다고 공무원 자리 새로 만드는 식의 ‘파퓰리즘(populism)’ 정부에 큰 기대를 거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 위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평면적으로 비교하면 국제 경쟁력과 재정건전성 모두 우리 사정이 월등히 낫다. 하지만 우리 역시 10여 년 전 외환위기를 심하게 겪은 나라다. 고도성장기의 구조적 비효율이 경제 구석구석에 쌓여 있다 한 순간에 터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경제가 어렵다고 노골적으로 정부가 빚을 내 총수요를 유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남미나 그리스식의 혹독한 긴축재정을 피할 수 있었다. 재정규율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실제로 경험한 경우다. 아쉬운 것은 위기 전과 위기 후에 집권한 각각의 정부가 좀더 지혜롭게 대처했다면 고통은 줄이며 경쟁력은 더 높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의 환상에 젖어 통화 평가절하 압력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 외국자본의 요구에 지나치게 굴복하며 고금리 정책을 오래 지속한 것, 노동자들의 지나친 희생을 통해 기업경쟁력을 회복한 것 등 따져보면 아쉬운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과 일부 은행은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이 상승했지만 여타 부문은 여전히 비효율이 만연하다. 재작년 시작한 금융위기 시에도 우리 경제는 외부충격에 쉽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 경제가 빠른 속도로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환율상승 효과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기 재정확대를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직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재정 여력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먼 시선으로 보면 외환위기 이후 재정규율이 현저하게 약해진 것 역시 사실이다. 위기가 끝나면 빚 갚을 생각부터 해야 하는 데 아직은 괜찮다며 빚을 내 정부 활동을 늘리는 습관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리스 베짱이도 늦가을까지는 “아직은 추위가 견딜 만 하다고” 자위했을 것이다. 낭비적인 정부가 있어도 부지런한 기업이 있는 한 우리가 그리스 같은 사태를 쉽사리 겪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마저 유능하다면 더 없는 행운이다. 만일 그 반대라면 왜 세금을 내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예산춘추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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